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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이 예쁜 시평마을] 이래저래 좋은 날2020-05-12

[돌담이 예쁜 시평마을] 이래저래 좋은 날


 

주거니 받거니

봄은 사람에게서 피어나네

 

할머니는 시집와 돌담쌓고

다람쥐는 금낭화 퍼뜨리고

 

전날까지 세차게 불던 바람이 잠잠해졌다. 바람이 숨을 죽이니 비로소 느껴지는 완연한 봄. 햇살도 좋고, 길을 따라 난 꽃도 어여쁘고, 이래저래 좋은 그런 날, 우리는 동상면 사봉리 시평(詩坪)마을로 향했다. 동상으로 가는 길목, 마을을 둘러싼 온 지천이 연녹색으로 가득이다. 요즘 동상면은 만경강 발원지인 밤티마을의 석산 개발에 대해 반대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보인다. 도로와 마을에 내걸린 반대 현수막이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돌담 따라 꽃길 따라 봄에 취해

봄의 기운으로 활기차지만 평화로운 어느 오전, 연석산의 넉넉한 품 안에 자리 잡은 시평마을은 어여쁜 돌담이 인상적이다. 돌담을 따라 걷다 금낭화 꽃길을 발견했다. 그 끝에는 파란색 지붕의 집이 한 채. 권주택(77) 할아버지의 집이다. 할아버지가 언젠가 집 근처에 금낭화 한두 개를 심었던 것이 어느새 길을 따라 퍼졌다.



다람쥐가 열매를 옮겨 다니면서 이렇게 퍼졌어요. 사람이 일부러 심으면 이렇게 예쁘게 안 되거든요. 옛날엔 다람쥐가 참 많았는데 다들 어디로 갔는지 요즘엔 도통 보기 힘드네요. 이 집은 우리 아버지가 지은 집이에요. 이 집서 옛날에 여덟 식구가 살았어요.”

할아버지 뒷집에는 정만순(84) 할머니가 살고 있다. 할머니가 시집 와서 시아버지와 남편과 돌담을 쌓았던 기억이 난다. 열일곱에 시집을 왔으니 돌담의 나이가 얼추 65살은 더 된 셈이다.

시집와서 이 집서만 살았어. 친정도 동상이니까 난 평생을 동상에서만 산거야. 마당에 핀 꽃 이름은 잘 몰러. 다 내가 심은 거지. 저 빨간 꽃도 좋아하고 파란 꽃도 좋아해. 오늘처럼 날 좋으면 이렇게 마당서 꽃구경 하면서 시간 보내.”

할머니 마당 안쪽에서 여리고 순한 두릅을 땄다. “할머니, 점심에 드시면 되겠어요라며 건네자 말없이 검은 봉지에 두릅을 담아주신다.

난 괜찮아. 갖고 가서 먹어. 맛있을 거야.”

 

산나물 다듬으며 막걸리 마시는 일상

달달달. 어디선가 경운기 소리가 들린다. 오종태(85) 할아버지가 부모님 산소에 다녀오던 길이다. 그 소리가 제법 경쾌하다. 마당 파릇한 잔디 위에는 나른한 멍멍이가, 부엌에는 아내 이덕순(75)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주서 살던 할머니는 처음 이 마을로 왔을 땐 갑갑했단다. “앞에 산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오래 살다보니께 괜찮아지더라고. 여긴 병원도 없고 교통도 안 좋아. 병원 갈람 모래내로 가야 되고.”

부부가 젊을 적엔 마을이 북적거렸다. 마을 규모가 컸고, 또래들도 많았다. 낮에는 열심히 일 하고 밤에는 다함께 모여 술 마시며 놀던 재미있던 시절. 지금은 낮이건 밤이건 마을이 고요하다. 젊었던 부부도 이제는 함께 늙어가는 사이가 됐다.

어떤 애기한테 우리 가난할 적 얘기해주니 그러더만. 라면이라도 삶아먹지 그랬냐고. 그때 라면이 어딨간. 그거 들음서 시대가 바뀌었다고 느꼈다니까. 우리 때는 부잣집 가서 나무 일하고 나락 베는 일 하면서 먹고 살았거든. 젊은 아가씨가 이해가 되려나 모르겠네.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꽃에 눈이 간다. 박정남(74) 어르신 집이다. 정남 어르신은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삼아 아침에 산에서 캐온 다래순을 다듬고 있었다. 능숙하게 흙을 툭툭 털어 칼로 꼭지를 딴다. 합다리순, 취나물, 고사리. 모두 오늘 아침에 캐온 봄나물들이다.

오늘 아침 8시 반에 산에 올라가서 캐온 거야. 고사리가 생각보다 많이 없더라고. 이렇게 산에 가서 나물 캐오는 게 요즘 재미지. 나물이 향이 참 좋아. 다래순은 무쳐 먹고 합다리순은 국 끓여먹으려고. 옛날에는 우리 시어머니가 나물을 캐다 주셨어. 그때도 취나물, 두릅, 고사리 뭐 이런 거였지. 잘구(자루)에 넣어서 이~만큼 캐오셔. 그거 가지고 시장에 팔러가기도 했었네. 다 옛날이야기야.”

마을 어귀로 마실을 나온 정숙희(65) 씨도 아침에 고사리를 삶아 놓고 나온 참이다.



집 뒤에 갔더니 누가 고사리를 먼저 끊어갔더라고요. 한 주먹 나오길래 삶아 놓고 왔어요. 저는 재작년에 이 마을로 귀촌했는데 조용하고 공기도 맑고 사람들도 좋아요. 아침저녁이면 산새 소리가 들리는 곳이에요.”

숙희 씨가 오자 안방에 있던 손영만(80) 할아버지도 얼굴을 비추신다. 갑작스레 열린 조촐한 막걸리 파티. 안주는 삶은 달걀과 김치가 전부지만 주거니 받거니 오가는 웃음이 그 상의 빈자리를 가득 채운다.

언제부터였을까. 봄을 풍경이 아닌 사람에게서 보게 된 것이. 시평마을 사람들의 하나같이 말간 얼굴과 생기 있는 목소리, 그리고 낯선 이를 경계하지 않고 반겨주는 그 마음이 봄처럼 맑고 눈부시다. 막걸리 한잔 시원하게 들이켠 정남 어르신이 말씀하신다.

그나저나 아가씨! 고마워요. 이런 집인데도 놀러 와줘서. 하하하


 


[시평마을은]

행정구역상 시평과 황조리, 연동마을 3개가 한 마을이다. 과거 사람이 많이 살던 시절에는 시평에만 50여 가구가 살았지만 현재는 3개 마을을 통틀어 35가구, 70여명이 거주한다. 논밭이 많지 않은 지역 특성상 산전(山田)을 일궈 감자나 메밀 등을 심었고, 산에서 감을 수확해 먹고 살았다. 최근에는 농사를 지을 젊은 사람이 없다보니 고추나 들깨 등 밭농사만 조금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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