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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지동리 터줏대감의 세상읽기2020-03-16

아랫지동리 터줏대감의 세상읽기


"신문보고 느낀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모으기 시작했지."


- 신지동 마을 최종규 어르신

 

내가 어디에 있든 버튼 하나만 누르면 모든 것과 연결되는 세상이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길을 걷다가도 스마트폰을 꺼내 찾아보면 된다. 순간 궁금증은 해결되는데 돌아서면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최종규 어르신의 오래된 집 마루에 앉아 한나절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스마트폰 볼 새도 없이 그저 순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것을 보았다. 어르신의 이야기 덕에 집으로 돌아와 나의 오래된 수첩을 꺼내 보았다. , 고등학교 시절

빼곡히 적어 놓은 온갖 글들은 대부분 영화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영화감독, 영화배우 이름, 영화제목 들을 깨알같이 적어놓고 외웠다. 토요명화가 시작하면 잽싸게 TV앞에 앉아 오프닝 화면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큰 소리로 읊어대며 가족들 앞에서 잘난 체를 하곤 했다.

날아가는 생각들을 수첩에 적어 놓기 바빴던 그 시절이 그립다.

최종규 어르신은 한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도 기록하고 관찰하고 그것을 모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 최종규 어르신이 1964년부터 모아온 책력이다.


용진읍 신지리 신지동마을의 최종규 어르신(85)300년 동안 8대를 이어 이 마을에서 살고 계신 한마디로 마을의 터줏대감이시다. 마을이 생겨난 연원과 최씨, 임씨, 이씨 등이 마을에 터를 잡고 살게 된 내력을 어르신은 오롯이 알고 계신다. 옛 사람들은 하늘과 땅의 이치와 변화를 중요하게 여겨 일 년 동안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일, 절기, 기후변동 등을 책으로 엮어 펴냈는데 그것을 책력(冊曆)이라고 한다. 누적된 기록은 위대한 발견을 낳는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달력도 책력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일 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로 이루어지고 1월부터 12월까지 열두 달이 지나면 한 해가 간다는 것도 옛 사람들이 오랜 동안 해와 달을 살피고 그 변화를 기록하며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아버님 돌아가신지 47년 되었는데, 그 당시 책력이라는 게 있어. 아버지 살아계셨을 때부터 모아오시던 것을 내가 이어서 매년 모으고 있어. 그거 아무나 못 보는 것이여. 우리 아버지가 처음 사서 모으던 것이 1964년이야. 책력에는 좋은 것은 다 있어. 농사짓는 사람들은 필수였어. 아버지 영향을 받기도 했지. 아버지도 생전에 책을 많이 읽으셨거든. 그때는 군에 갔다 온 사람, 한문 아는 사람이 이장을 했어. 군에서 나오는 공문들이 다 한문이었어. 그때만 해도 한글도 모르는 판에 한문 아는 사람이 드물었어. 195054일 졸업을 하고 중학교 다니다가 6,25가 터지면서 학교를 못 다닌 거야. 전쟁 통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었겠나. 학교를 못갔으니 야학교(양당, 개명학교 라고도 불렸다)에서 공부했지. 거기서 한문을 알려주던 분이 신가송 선생이었어. 15살 이후 23살 군대 가기 전까지 신가송 선생님 밑에서 한문을 배웠어.”




- 어르신이 스크랩한 신문은 오랜 세월을 증명하듯 노랗게 바래있다.


어르신께서 읽고 모아두시는 것은 책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책력을 통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셨다면 신문읽기를 통해 세상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접했고 복잡다단한 세상의 흐름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셨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던 시절 어르신은 신문을 통해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문화에 대한 안목을 넓히셨고 그중 인상적인 지면들은 아홉 권의 스크랩북에 꼼꼼하게 편철되어 있었다. 198195일부터 시작한 일이다.

한 권 당 일이 년이 소요되는데 내가 열 권 까지는 만들어놓고 가야지 내가 신문을 60년 가까이 봤어. 그런데 보고 내쏘고 내쏘고 하니까 아무 근거가 없는 거야. 그래서 기억이 더 사라지기 전에 시작한 거지. 신문 보고 느낀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첫 페이지가 일본 침략에 대한 것이었어. 일본이 우리 나라사람들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 이야기로만 들었지 이렇게 자세하게 신문에 실린 것을 보고 나니까 아. 이것을 꼭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 마음으로 시작한 거지. 신문은 조선일보가 잘 만들기는 해서 오랜 동안 봤는데 작년에 끊었어. 왜 그런고 하니 너무나 우측으로 치우쳤어. 정치면은 일절 안 보게 되더라고. 하지만 사설은 꼭 챙겨봤어. 그런데 베렸어. 공정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해.”


 

- 왼쪽페이지 상단의 왼쪽편에 안중근 의사가 보인다.


어르신의 신문 스크랩북에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부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같은 오래된 정치인의 사진들이 있었고 이리역 폭발사건, 88서울올림픽, 황영조의 금메달 사진 등 현대사를 수놓은 여러 인물과 사건들이 망라되어 있다. 어르신은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이름을 외우고 계셨고 케네디와 후르시초프 시절에 냉전시대가 이어진 이유,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시절을 거치며 독일이 통일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의 근거를 들어가며 설명해 주셨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스물다섯에 마을 이장을 거쳐 열 가지가 넘는 사회적인 이력을 만들어가며 살아오실 수 있었던 힘은 어쩌면 스스로 배우고 읽고 그것들을 모아두는 오래된 습관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 2005년 전라감찰사 행렬 재현행사에서 20대 할아버지인 최유경 전라감찰사 역으로 발탁됐던 최종규 어르신.


그동안 농사짓고 먹고 살았지. 인삼재배도 하고 누에도 키우고 젖소도 한 십 년 키웠어. 지금은 대추농사 지어서 로컬푸드 매장에 납품하지. 스물다섯 살에 이장 일을 보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어. 신지리 조합장, 용봉초등학교 육성회장, 신협 이사장, 윤강회 회장, 농촌지도자회장, 노인회장, 동악동민기념사업회 용진지국장, 전라북도 국사편찬위원 같은 일들을 했어. 내가 외부활동을 많이 하다보니까 아무래도 안식구가 고생을 많이 했지.”

 

오래된 사진첩에서 본 어르신은 풍채가 참 좋으셨다. 2005년 전라감찰사 행렬 재현행사를 했을 때 어르신의 20대 할아버지인 최유경 전라감찰사 역으로 발탁된 것도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마도 옛 사람들의 호방하고 품격 있는 풍채를 가지셨던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건강이 나빠지고 네 번의 수술 끝에 살도 많이 빠졌지만 어르신은 두 번째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고맙게 살고 있다고 하셨다. 어르신의 스크랩북을 다시 훑어보다 정갈한 글씨가 써진 종이를 발견했다.


 

-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는 노래말이 적힌 메모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십년동안 산소들 다녔어. 댕기다 봉게로 노래를 하나 지어야 겠더라고. 산소 오가면서 드는 생각을 노래로 만든 거야. 이렇게 가삿말을 적어 둔 것은 나중에 나 죽으면 산소 비석에 이 가삿말을 새겨 달라고 아이들에게 말을 남겼지.”

 

오랜 동안 해와 달을 살피고 그 변화를 기록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에 차곡차곡 담아 써내려간 귀한 가삿말이다.


1: 가로등 달빛 삼아 산행길에 나선 이 마음 어제도 오늘도 어둠을 헤치면서 괴롭다 하지 않고 그 누구를 위하여 찬바람 무릅쓰고 조각달만 쳐다보며 총총히 걸어가는 고독한 이 마음

2: 가로등 별빛 삼아 하산길에 나선 이 마음.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괴롭다 하지 않고 그 누구를 위하여 눈보라 치는 밤에 조각달만 쳐다보며 총총히 걸어가는 고독한 이 마음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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