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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의 완주이야기 66] 구이면 원기리 비석2020-02-12

[이승철의 완주이야기 66] 구이면 원기리 비석


구이면 원기리 비석



돌에 이름 새겨 오래 전해지는 사람 있는데, 구이면 원기리 농업협동조합(조합장 안광욱) 옆 비석 두 개는 아주 대조적이다. 비석 세운 주민들이 대단했다. 이것은 구이정신으로 봐야한다.

1989(석구·원당·중인·용복) 좋은 들판을 전주시에 내주고, 89.08남았지만 정신은 언제나 꼿꼿하다. 120여년 전 어르신들은 어려운 살림에도 왜 비석을 세웠을까? 지금 사람들과 다르다. 훌륭한 인물 그 공적 알아주고포악한 자 잊지 말자는 강렬한 의지를 들어냈다고 봐야한다. 판관박후 제근 애민선정비(判官朴侯 齊近 愛民善政碑:가로 46, 두께 22, 높이 123cm)는 인정이 넘쳐난다. ‘전주 판관(1877) 박제근(18191885)은 백성 사랑했고 선정을 베풀었다.’는 높은 치적과 선량한 백성들의 본심이 새겨졌다. 선정내용은 보이지 않으나 인품이 근엄하여 공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가는 곳마다 선한 정치를 했으며,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시문집 경암유고(敬菴遺稿)가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러러 볼만한 인물이었다.


균전사 김공창석 영세불망비(均田使金公昌錫永世不忘碑:가로 46, 두께 22, 높이 130cm)의 주인공 김창석은 1894년 동학혁명 전후에 전라도 균전사이었다. 세금을 조정하고 거두는 관리로 농민들이 벌벌 떠는 사람에 속한다. 기업인들 가장 두려운 게 세무조사 아닌가. 김창석은 역사에 어둔 기록을 남겼다. 동학농민혁명을 불러들인 고부군수 조병갑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이 말은 백성을 괴롭혔다는 말이다. 몇 마디를 소개하면 () 균전사 김창석이 백지징세(白地徵稅)를 한 것. 즉 농사짓지 않은 땅에 세금을 매기었다는 말이다. 이런 자 그냥 놔둬선 아니 되었다. 결국 균전사 김창석(金昌錫) 균전 잘못 조사한 죄로 충청도 홍주목(洪州牧)에 귀양 갔다. ‘못된 여석 영원히 잊지 말자.’는 억센 구이정신이 담긴 비석으로 보인다. 왜 소중한가. 변교사(反面敎師)가 되기 때문이다. 간접 효과도 컸다. “백성 괴롭히면 언제나 누구든지 이 꼴된다.”는 경고성 구조물이다. 지금 성난 국민들이 드는 촛불과 팻말이 문제 아니다. 포학한 자 그 이름을 돌에 새겨 정의사회의 초석으로 삼았다.

이래서 하는 말인데 완주군청 들어서면 너른 공간 여기에 청백리 육대춘(陸大春) 흉상을 세워 공무원 군민 함께 보며 으뜸 도시의 새 정신 표상으로 삼았으면 한다. 생화와 조화 다름은 생명력 때문이다. 돌의 질, 글씨, 보존상태, 이웃집 얘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이제부터 구이 면민은 이 비석을 당당하게 내세워도 마땅하고, 누구나 일 잘하면 비 세워주는 열성이 식지 말아야 하며, 균전사 비석은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다고 봐야한다. 송이목 면장은 통찰력·추진력을 발휘하여 비석을 더 좋은 자리로 옮기면 이 자체가 치적이다.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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