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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녀 할머니의 100년2019-11-14

백성녀 할머니의 100년



백년이 지났어도 가을 산처럼 눈부시게

동상면 수만리 입석마을 백성녀할머니

 

11월이 시작되고 가을 산에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야트막한 산비탈에 자리 잡은 붉나무가 먼저 빨갛게 물들었고 온 산에 지천인 도토리나무들도 점점 연노랑 색으로 번져가고 있다. 단풍 든 가을 산의 색채와 질감을 햇살과 바람에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그 산의 모습을 나는 제대로 된 말과 글로 표현할 방법을 모른다. 다만 그 풍경이 참 아름답다고 느낄 뿐이다. 동상면 수만리 입석마을의 백성녀 할머니를 찾아가는 길은 온통 단풍이 시작되고 있는 가을 산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저번 설 쇠고 백 살이여

 

지금은 백세시대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실제로 백세가 된 어르신을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칠십대와 팔십대에 접어든 어르신들은 더러 인터뷰에 나섰지만 백세를 맞은 어르신을 직접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할머니는 마을회관에도 댁에도 계시지 않았다. 밭에서 일하시는 마을 어르신께 할머니가 어디 계신지 여쭈었더니 손가락으로 뒷산을 가리키며 저 산에 가셨을 거라는 대답을 들었다.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백세가 넘으신 할머니가 오르기에는 제법 큰 산이었다. 산 아래 오른쪽으로 길이 나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고 있을 때 멀리서 분홍색 윗도리를 입고 뒷짐을 진 채 허리를 꽂꽂이 세우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산 속에 있는 표고버섯 밭에 다녀오시는 길이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매일 산책하는 산


고향은 여기 입석마을이여. 우리 아버지가 백씨인디 나하고 언니하고 둘만 낳았어. 키워서 나를 아들로 삼았고 사위를 집으로 들여서 돌아가실 때 까지 내가 모시고 살았어. 어머니, 아버지 다 일찍 돌아가셨어. 우리 백시덜 다 일찍 돌아가셨는디 나만 이렇게 오래 살았네. 아버지는 칠십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육십 다섯에 돌아가시고 우리 형님도 저기 사복리 사는디, 아들 삼형제 딸 둘 그렇게 낳아서 팔십 야달인가 먹어서 갔는디 나는 이렇게 백 살 넘도록 살아 있어.”

 

6.25 때 용케 살아서 내가 오래 사는가벼

 

백세를 일컫는 말로 상수(上壽)’라는 표현을 쓰지만 국어사전에는 오랜 세월이라는 설명도 곁들이고 있다. 이토록 오랜 동안 살아오신 어르신께 어떻게 살아 오셨는지 무엇을 기억하고 계신지를 여쭙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깊지만 정갈하게 주름진 할머니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면서 그래도 가장 힘든 시절이 언제였는지 여쭤봤다.

 

하이고, 사는 것이 참말로 6.25사변 일어나 갖고 참 고생헌 것이 말로 다 못혀. 빨치산들이 들어와서 집 다 불 질르고 사람 다 죽이고 나도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어.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그 사람들한테 붙잡혀서 내가 산 속에 도망가 있다가 찾아 왔는디 몇 번 총으로 쏴서 죽일라고 해도 어떻게 용케 살았어. 그리서 어머니 아버지 데리고 온 게로 대한민국 군인들이 와서 빨갱이 아니냐고 나를 죽여 버린다고 끌고 가는디 또 어떻게 용케 아는 사람을 만나서 살게 됐어. 그때 나 나이가 스물 다섯살인가 됐어. 그리서 내가 이렇게 오래 사는가벼.”


 

막내아들 내외와 살고 있는 집


할머니는 6.25 전쟁과 그때 고생했던 이야기를 참 오랜 동안 반복해서 말씀해 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집과 전답이 불에 타고,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숨고, 송광사까지 도망가서 아이들을 맡기고 부모님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고개를 넘은 이야기들을 할머니는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 내셨다.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세상 참 살기 좋다는 말씀도 하셨다.


 

할머니가 다니시는 낡은 외양이 멋스러운 교회


나 열일곱 바깥양반 스물한 살 먹고 결혼했어.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기가 막히게 키웠지. 바깥양반 이름이 유성배. 논산 사람이여. 부모님이 일찍이 죽어서 여기 와서 살다가 누가 말을 해줘서 결혼했어. 나한테 참 잘해줬어. 일십칠 년 전에 돌아가셨지. 딸 셋 아들 둘 뒀어. 평생 여기서 살았지. 전주 사는 딸들이 저희 집이서 살라고 그래도 아파트 갑갑해서 살도 못해. 여기 있으면 며느리가 겁나게 잘 혀. 농사 지어먹고 살았어. 나락, , , 서석 그런 거 해 먹었어. 여기는 감 농사를 많이 해. 일정 때는 일본 놈들이 다 와서 따가고 그랬어. 한국 사람들 다 보내고 지들이 여기 와서 살라고 그랬는데,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만세 불러갖고 안 가도 됐어. 그때는 라디오도 없고 병원도 없고 약방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 그때는 병에 걸리면 겁나게 죽었어. 지금 세상 좋지. 자기 맘대로 먹고 잡은 거 다 먹고 정부서 다 이렇게 돌봐준 게 얼매나 좋아.”

 

백살이나 먹은 내가 탐날 게 뭐가 있어

 

할머니의 기억과 이야기들은 백년이라는 세월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 농사 이야기, 일정 때 이야기 같은 복잡하고 다단한 기억들을 막힘없이 풀어내셨다. 오랜 세월 탓에 귀는 잘 들리지 않으셨지만 말씀만은 논리가 정연했고 막힘이 없으셨다. 마을회관 할머니 곁에는 늘 칠순 팔순의 마을 할머니들이 함께 앉아 계셨다.


 

입석마을회관에서 주민들과 식사 중인 백성녀 할머니. 밥 한 그릇 거뜬히 드시고 식후에 커피 한 잔씩 꼭 하신다.


저번 103일 날 백살잔치 했어. 딸들이 아들하고 다 걷어갖고 했어. 마을사람들 음식도 대접하고 손님들도 많이 오고 아들 친구들이 돈도 가져오고 금도끼도 하나 해오고. 며느리 줘버렸어. 나는 이제 아무 것도 필요가 없어. 옷이고 신발이고 용돈이고 다 딸들이 줘. 며느리들도 잘 혀. 나는 자식들이 주는 놈 갖고 살아. 백 살이나 먹은 내가 탐날게 뭐가 있어.”

할머니는 지금도 밥 잘 드시고 보건소에서 다리 아픈 약 타 드시는 것 말고는 약도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오면서 봤던 가을 산의 단풍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색채와 질감, 햇살과 바람에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단풍처럼 할머니의 모습도 참 아름다웠다. 입석마을의 바위가 마을의 이정표가 됐던 것처럼 백년 넘게 마을에서 살고 계시는 할머니께서도 오랜 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됐으면 좋겠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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