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이달 완두콩
  • 품앗이 칼럼
  • 지난 완두콩

기획특집

> 이달 완두콩 > 기획특집

[큰 사람 난다 거인마을] 한분이 할머니2019-11-13

[큰 사람 난다 거인마을] 한분이 할머니


 

“징그랍게 울었는데 이제는 날마다 웃어


전쟁통에 족두르도 못쓴채 시집와

남편 일찍 여의고 혼자 자식 키워

며느리 복 "비행기 원없이 탔어"

 

집 앞 너른 나무평상 위에 한분이(83) 할머니가 앉았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 공공근로를 막 마치고 온 참이다. 평상 아래로는 마을의 다른 집들과 울긋불긋 물 들어가는 대부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림 같은 풍경을 마주하고 할머니는 따뜻한 가을볕을 쐰다. 평상 위 커다란 둥구나무가 그늘을 만든다.

나무가 있어서 여기서 여름이면 할매들 모여서 많이 놀았어. 근데 노인네들 다 죽어서 얼마 안 남았어. 내 또래도 몇 명 안 남았네.”

할머니는 16세에 소양에서 거인마을로 시집왔다. 어린나이에 3대독자 외아들한테 시집와서 시집살이도 하면서 아들 여섯에 딸 하나를 낳았다.

친정이 가난해서 열여섯 살 먹고 시집 왔어. 전쟁 통에 결혼도 소반에 찬물 떠놓고 절한 걸로 끝났어. 족두리도 안하고. 그게 늙으니까 원이 되대. 족두리 한번 못 써본 게. 내가 시대를 잘못 태어난 거지.”




남편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남은 자식들을 건사하느라 할머니는 일을 많이 했다. 고생 징그럽게 했다며 굽은 허리를 가리킨다.

허리수술하고 병원 다니면서 주사 맞고 하니까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공공근로도 약 먹으면서 하니까 할만 해. 남편이 빚지고 애들만 여럿 낳고 세상을 떠나니까 애들이 알아서 컸어. 불알만 차고 시내로 나가서 일 하면서 핵교 다니고.”




고생해서 키운 자녀들은 멀게는 서울, 가깝게는 완주에서 산다. 형제간에 우애가 좋다. 얼마 전에는 취직한 손주가 용돈도 줬다.

봉동 사는 손주 하나가 복지사로 일하는데 취직했다고 용돈 십만 원을 주고 갔어. 어찌나 고맙던지. 내가 손주 덕을 다 봐. 우리 딸? 서울에 있는데 우리 딸은 바라보기도 아까워. 아들만 여섯을 낳았으니 얼마나 귀혀. 나 딸 낳고 동네잔치 했잖아.”

몇 년 전에는 넷째 아들 내외와 함께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족두리는 못 써봤지만 비행기는 원 없이 타봤다는 분이 할머니.

아들 내외랑 손주, 안사돈까지 해서 넷이 태국인가 갔다 왔어. 생전에 고생만 했으니까 구경이라도 하라고 우리를 데리고 간 거야. 우리 넷째는 지금 정년퇴직해서 시골집 자주 왔다 갔다 해.”

자식 자랑으로도 바쁘실 것 같은데 분이 할머니는 며느리 자랑에 더 바쁘다.

우리 며느리들이 하나같이 얌전하고 좋아. 동네 사람들도 내가 시어머니 살아생전에 잘해서 복을 타서 그런 거 같다고 해. 연속극 보면 며느리들이 못돼먹어서 시어머니랑 안 좋고 그러는 것도 있더만. 근데 우리는 안 그래. 며느리가 잘하니까 아들들도 잘하지. 나는 자식들한테 재미있게 살아라, 며느리한테 잘해라 늘 그래.”



할머니는 유독 웃음이 많다. 작은 이야기에도 하하하하고 큰 소리로 웃는다. 예전에 사주팔자를 봤는데 말년에 덕을 보고 산다고 했던 말이 맞은 것 같다고 하신다.

옛날에는 힘들고 슬프면 나 혼자 숲에 들어가서 온갖 소리를 지르면서 울었어. 징그랍게 많이 울었네. 힘드니까. 근데 시방 지금은 좋아서 웃고 다녀. 속 썩이는 사람이 없으니까 맨 날 웃고 다녀. 죽을 때까지 좋게 살아야지. 악한 말도 하면 안돼. 그래야 세상을 편하게 살 수 있어.”

할머니의 남편도, 대부분의 친정 식구들도 세상을 떠났다. 자식들도 외지로 떠나 집에는 혼자다. 외로울 만도 한데 할머니는 오히려 신경 쓸 게 없으니 노래가 절로 나온다며 웃는다. “예쁘세요라고 말을 건네니 할머니는 또 웃으신다.

내가 살다 살다 예쁘다는 소리는 첨 들어보네. 하하하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할머니가 직접 심었다는 국화도 살랑살랑 춤을 춘다.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이전글
[큰 사람 난다 거인마을] 채충임 할머니
다음글
[큰 사람 난다 거인마을] 진상품 고종시의 고장
코멘트 작성 ※ 최대 입력 글자 수 한글 120자 (255 by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