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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오래된 집 2부: 내 손으로 일군 땅2019-04-01

할머니의 오래된 집 2부:  내 손으로 일군 땅

할머니의 오래된 집

2부 내 손으로 일군 땅


- 이서 갈동마을 김양금 할머니

 

김양금 할머니의 묵은 살림에는 곰삭은 인생이 담겨있다. 그 이야기를 한 번에 꺼내놓는 것이 차마 아쉬웠다. 집 주변에서 캐온 쑥, 돌나물 등을 다듬는 할머니의 손, 흰 머리, 얼굴의 주름들을 바라보며 옛날이야기들을 계속 듣고 싶었다. 아쉬운 마지막 이야기다.


김제 너른 평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양금 할머니(83)는 스무 살에 이서면 갈동마을로 시집왔다. 할머니가 새색시였을 때의 풍경과 지금의 풍경은 많이 변했다. 마을 앞뒤로 큰 도로가 나고 높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할머니가 살고 계신 갈동마을의 옛 이름은 치릇마을이었다.

 

새색시 시절에 마을 어르신들이 하는 말을 들었지.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산에 폭 안겨 있었지. 지금 도로 있는 곳이 다 산이었어. 그러니까 꿩이 숨어든다고 꿩 치자를 써서 치릇마을이라고 했고, 또 마을 뒤로 옻나무가 많았는데 그래서 치릇골이라고도 했는가..”



양순 할머니 집은 지어진지 200년 이상 됐다. 부엌 위 서까래는 그을렀고 오래된 주춧돌도 세월에 깎여나갔다. 




 

치릇약방 며느리. 곁에 남은 육남매

할머니의 시아버지는 그 당시에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어서 동네에서 글도 가르치고 치릇약방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계셨다고 한다.

 

우리 시할아버지가 하시던 한약방을 시아버지(임익환)가 이어 받아 했지. 유명해서 익산이나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어. 약 짓는 곳은 대문 밖으로 문이 있었는데 댓문으로 들어오면 사철나무가 문 양옆으로 예쁘게 있었지. 약 지러 오는 사람들은 그 댓문으로 돌아서 약방으로 드나들지. 처음 시집와서는 3년은 문밖을 못나갔어. 새색시라고 해서. 우리 시집이 엄했어. 울안 시암도 있으니까 집안에서만 살림했지.”

사철나무가 예쁘던 치릇약방에서 8년을 살다가 분가했다. 할머니 나이 31살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시아버지가 살던 집이 비어있게 되자 할머니 가족이 그 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 집이 할머니가 현재 거주하고 계신 집이다. 이서면의 큰 부자였던 김공태라는 분이 지은 집으로 200년도 넘었을 거라고 하신다. 그 사이 육남매를 낳았고 막내가 막 돌을 지났을 무렵,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 나이 37살이었다. 사람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약방. 시댁에서 일하는 일꾼들, 시댁 식구들 모두 떠나고 할머니와 여섯 아이만 남게 되었다.

    

나 혼자되었을 때는 여자들이 어디 가서 뭐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엄두도 못 냈지. 누가 시집을 다시 가라고 하는데, 우리 막둥이 돌 지난 거 있고, 위로 새끼들은 줄줄이 있지, 어떻게 갈 것이여. 시골에서는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게 농사밖에 더 있어. 애들 논 두덩에다 데려다 놓고 하루 종일 일을 하는 거지. 해가 지면 모기가 무니까 우리 아이들이 막 울어. 집에 가봤자 아무도 없으니까 내가 논밭으로 일하러 가면 나 따라 오는 거야. 애들이 울어도 그래도 나는 못가지. 하던 일을 마무리해야 가는 거니까. 겨울에는 전주 가서 건어물 떼다가 집집마다 팔러 다니기도 했지. 우리 막둥이 업고 장사하러 다녔는데 눈길에 둥글러지기도 하고..애들들 데리고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았지.”

김양금 할머니는 아직도 아궁이에 불을 떼서 생활한다. 그을음에서 세월을 엿본다.


할머니의 곰삭은 살림살이들.

    

돈 벌러 떠났다가 20년 뒤 다시 돌아온 내 집

시골에서는 도저히 육남매 굶기지 않고 살 방법이 없었다. 스무 살이 지난 큰 딸이 전주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던 터라 아이들을 큰 딸에서 맡기고 할머니는 홀연히 인천으로 떠났다.

 

마흔 일곱에 인천으로 올라갔는데 아이고 말도 못혀. 할 줄 아는게 있어야지. 우리 외사촌이 그려 순대 장사를 하면 괜찮다고 해서 순대 전문점들이 모여 있는 석바위 시장으로 갔지. 순댓집 아줌마한테 내 사정 이야기 했더니 순대 만드는 것을 알려주더라고. 그렇게 허드렛일 하면서 배운 거지. 그 뒤에 청천상가라고 조그만 시장이 생긴다고 해서 거기 쬐그만한 좌판 하나를 빚내서 얻어서 순대장사를 시작한 거지. 한 쪽 구탱이에 연탄을 조그맣게 놓아두었어. 거기서 순대 끓이고. 거기가 따뜻하니까 구부리고 먹고 자고 살았지. 겨울에는 몸 여기저기 얼음 배겨가지고 얼어터지고 그랬어. 2년을 고생하니까 방 하나 구할 돈이 모아져서 전주에 있는 애들을 오라고 해서 같이 살았지.”


 

할머니는 평생 쉬어본 일이 없다. 야채장수, 식당일을 하며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


오후에는 마을회관에 나와 이웃들과 시간을 보낸다.

어디 가서 한가하게 한 번 놀아 본 적이 없었다. 야채 장수, 식당일을 하다 보니 월세방에서 전세방으로 옮겨갔고 어느 덧 25평짜리 낡은 아파트 한 채가 자신의 몫으로 생기더란다. 환갑을 보냈고 자식들도 시집장가 가서 아무 탈 없이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 집이 다시 생각났을까. 20년 가까이 비어있던 그 집. 한 때는 육남매가 고물거리던 그 집. 할머니보다 두 살 위의 남편과 살 던 그 집. 하루 종일 빛이 잘 들던 그 집. 김양금 할머니는 혼자, 다시 그 집으로 돌아왔다.

 

땅 만지면서 일하고 싶더라고. 애들 아버지 돌아가시고 인천가기 전까지는 그래도 여기 땅에서 내가 일한 기억이 있으니까. 내 땅 일구며 사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이었지. 2002년도 다시 여기 왔을 때 댓돌 앞까지 대나무가 꽉 들어차 있었어. 방문도 떨어지고 집이 엉망이었지. 그래서 동네 이웃집에서 한 달 동안 지내면서 해 뜨면 와서 대나무를 자르고 그랬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종이 사서 싹 바르고, 장판 얻어서 깔고 아궁이에 불 때가면서 이 집에서 먹고 자면서 대나무를 끊으며 겨울을 난 거지. 톱하고 낫 하나 가지고 10월 말에 와서 하루에 조금씩 끊어서 다음해 2월까지 그 짓을 했지. 사람도 안 부르고 혼자서 했어. 그렇게 저렇게 살다보니 한 세월이 다 갔지. 마지막 살 곳을 내 손으로 만든 거야. 지금 제일 편해. 인천 애들 집에 가면 일주일도 못 있어. 답답해서. 그렇게 오고 싶어. 여기 내 집으로 오고 잡어. 내가 일평생 살면서 한 가지 보람 있는 일을 뽑아보라고 하면 이 집 대나무 끊어서 밭 만든 일이야” 

 

오래된 집으로 돌아온 양순 할머니는 이곳에서 살아갈 생각이다. 남편과 자식들과 함께 살던 그때를 기억하며.


꿩이 날아드는 산과 그 산의 옻나무들이 사라지는 사이 할머니가 사는 마을의 옛날 흙집들은 진작에 사리지고 없다. 하지만 김양금 할머니를 기억하는 이웃들은 여전히 땅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할머니의 새색시 시절과 남편을 먼저 보낸 눈물을 기억하는 이들이다. 오래 전에 묻어놓았던 유물을 발굴 하듯 과거에서 꺼내 놓은 그 집에서 할머니는 현재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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